
1997년 1월 3일, 멜버른에 도착하다
1997년 1월 3일, 스물일곱 살이었던 나는 호주 멜버른에 도착했다.
호주에서 오래 살 계획은 전혀 없었다. 당시 호주에서 어학연수를 하고 있던 친구가 잠시 와서 영어를 공부해 보라고 권했고, 나 역시 단기간 머물 생각으로 비행기에 올랐다.
원래 가고 싶었던 나라는 미국이었다. 그러나 미국 비자를 받지 못하면서 계획을 바꿔야 했고, 결국 차선책으로 선택한 곳이 호주였다. 그때는 이 선택이 내 남은 인생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멜버른으로 향하는 비행기에서 나는 별생각 없이 뒤쪽에 있던 흡연석을 선택했다. 당시에는 비행기 안에도 흡연석이 따로 있었다. 하지만 비행이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선택을 후회했다. 옆자리에는 러시아 격투기 선수 표도르처럼 체격이 크고 무뚝뚝하게 생긴 아저씨가 앉아 있었는데, 비행 내내 쉬지 않고 담배를 피웠다. 사방에 담배 연기가 가득해 제대로 잠을 잘 수도 없었다. 그때 깨달은것은 흡연자도 비흡연자의 고통을 알수있다는 것이다.
내가 알고 있던 호주의 모습 호주에 오기 전, 내가 이 나라에 대해 알고 있던 것은 많지 않았다.
어린 시절 백과사전에서 보았던 사진 한 장이 특히 기억에 남아 있었다. 말을 탄 경찰이 도시 한가운데를 순찰하는 사진이었다. 그리고 호주는 ‘요람에서 무덤까지’ 복지가 보장되는 나라라는 설명도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었다.
그것이 당시 내가 알고 있던 호주의 전부였다.
사람이 보이지 않았던 멜버른 시내
처음 도착한 멜버른의 인상은 ‘조용하다’는 것이었다.
시내인데도 거리에 사람이 별로 없었고, 날씨는 무척 더웠다. 지금 생각해 보면 연초 휴가 기간이라 멜버른이 평소보다 한산했던 것 같다. 하지만 당시의 나는 그런 사정은 알지 못하고 ‘호주의 큰 도시가 왜 이렇게 조용하지?’ ' 인구가 적다고 한더니 역시 서울과 비교 되네..'
아마 그것이 멜버른에 도착한 뒤 처음 가졌던 생각이었을 것이다.
공항에서 친구가 살고 있던 호손(Hawthorn)으로 이동했다. 내가 처음 본 호손은 한국의 작은 시골 동네처럼 느껴졌다. 낮에도 조용했지만 저녁이 되면 길을 걸어 다니는 사람을 거의 볼 수 없었다. 동네에 있던 작은 펍과 한적한 거리, 낯선 집들이 내가 기억하는 당시 호손의 모습이다. 영어를 한마디도 제대로 하지 못했던 나에게 호주는 모든 것이 낯설었다. 거리의 간판도, 사람들의 말도, 생활 방식도 익숙하지 않았다. 지금은 일상이 된 멜버른이지만, 그때는 내가 전혀 알지 못하는 세상에 혼자 들어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일본에서보다 호주에서 더 많이 사귄 일본 친구들
호주 생활은 호손에 있는 어학원에 다니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당시 어학연수를 온 한국 학생들과 비교하면 나는 나이가 조금 많은 편이었다. 그래서인지 한국 학생들보다 일본 친구들과 더 자주 어울렸다. 호주에 오기 전 일본에서 5년 동안 유학한 경험이 있었고, 일본어로 대화하는 것이 편했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일본에서 생활할 때는 일본인 친구를 많이 만들지 못했다. 당시만 해도 한국에서 온 유학생이기에 차별도 있었고 해서 쉽게 일본인 친구를 만들 기회는 없었다. 그런데 호주에 와서는 오히려 일본 친구들이 더 많이 생겼다.
낯선 나라에서 서로의 언어와 문화를 조금이라도 알고 있다는 사실이 사람들을 더 쉽게 가까워지게 했던 것 같다. 인생의 인연은 언제, 어디에서 시작될지 모르지만 만나는 장소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느꼈다.
29년 전의 기억을 다시 꺼내며
그로부터 29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오래전 일이라 대부분 잊었다고 생각했지만, 글을 쓰기 위해 기억을 하나씩 꺼내 보니 당시의 장면들이 놀랄 만큼 선명하게 떠올랐다. 무더웠던 날씨, 사람이 드물었던 거리, 호손의 조용한 저녁, 어학원에서 만난 친구들의 모습까지 기억 속 어딘가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나는 왜 이제야 지난 삶을 글로 기록하려는 것일까.
사람에게는 자신이 살아온 흔적을 어딘가에 남기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 같다. 나 역시 오래전부터 내가 걸어온 길을 한 번쯤 글로 정리해 보고 싶었다. 특별히 성공한 이야기만을 남기려는 것은 아니다.
짧은 어학연수로 시작한 호주 생활에서 어떤 사람들을 만났는지, 어떻게 이곳에 정착하게 되었는지, 무슨 일을 하며 살아왔는지 기록하고 싶다. 잘했던 선택뿐 아니라 실패했던 순간과 후회했던 일, 그리고 다시 일어서 도전했던 과정도 솔직하게 쓰려고 한다.
스물일곱 살에 잠시 영어를 배우러 왔던 청년은 어느새 호주에서 29년을 살았다.
이 글은 완성된 성공담이 아니다. 한 사람이 낯선 나라에 뿌리를 내리며 살아온 이야기이며, 지금도 실패와 도전을 반복하고 있는 삶의 기록이다.
1997년 1월 3일 멜버른 공항에 도착했던 그날부터 시작된 나의 호주 이야기를 이제부터 하나씩 꺼내 보려고 한다.